혼란한 세상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 파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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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D] 진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유지하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 연꽃. 나쁜 환경에서도 성품을 더럽히지 않고 자비심을 키우며 선을 행하는 것이 곧 깨달음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불교와 인연도 깊다. 진(眞)·선(善)·인(忍)의 가르침을 따르는 파룬궁 수련자들의 모습은 연꽃과 많이 닮았다. 어디에서나 남을 먼저 고려하고 늘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심성을 높이는 사람들. 이런 이유로 90년대 초, 중국에서 나타난 심신수련법 파룬궁의 출현은 지금과는 다른 중국을 기대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전통문화의 파괴가 가져온 도덕의 타락

관광지에서 시끄러운 목소리로 떠들고 낙서를 하는 이들, 지나가던 이가 쓰러졌는데도 구경만 하는 이들, 돈을 벌려고 먹는 사람이야 어찌 됐든 가짜 음식을 만드는 이들…. 이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떠오르는 한 나라가 있을 것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바로 중국이다. 세계인에게 중국인은 어느새 이런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인성이나 도덕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문화유산이 불길 속에 사라졌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문화유산이 불길 속에 사라졌다.

60년대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은 혼란과 피를 불렀고 수많은 전통문화를 파괴했다.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전통문화에 대한 상실감을 경제발전으로 대체했다. 그 후, 무신론 공산국가에서 돈을 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차원의 종교가 됐다.

허하이훙 중국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는 “중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양심이 윤리적 최저선까지 떨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아서 왈드론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역시 “오늘날 중국의 총체적인 문제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가치관이 없어 삶이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기공은 바로 그 점에 호소해 주목을 받았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90년대 기공수련, 특히 파룬궁은 문화대혁명 이후의 사회적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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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국에서는 시골마을 공터에서, 도시의 공원에서 5장 공법으로 이뤄진 파룬궁 연공을 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국에서는 시골마을 공터에서, 도시의 공원에서 5장 공법으로 이뤄진 파룬궁 연공을 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진(眞)·선(善)·인(忍), 파룬궁의 시작과 성장

오랜 기간 단독으로 전수되어 오던 파룬궁은 1992년 5월 13일 중국 지린성 장춘시를 중심으로 리훙즈(李洪志) 선생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에 전파됐다. 불가 및 도가 사상에 기초를 두고 진(眞)·선(善)·인(忍)을 핵심사상으로 한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문화혁명 시기 철저히 파괴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기억을 다시 일깨웠다.

당시 중국에는 운동, 무술, 명상, 호흡 수련법 등이 급속하게 관심을 받으며 ‘기공 열풍’이 불고 있었다. 특히 파룬궁은 다른 기공과는 달리 회비나 등록비가 없고, 동작이 간단하고 배우기 쉬우며, 수련 효과가 뛰어나 별도의 광고 없이 자발적으로 퍼졌다.

건강이 좋아지고 직장 및 생활 속에서 심성과 도덕성을 높이는 이들이 늘어나자 중국 당국도 파룬궁을 반겼다. 당시 모든 기공 단체는 국가 기관인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에 관리했고 리훙즈 선생도 1992년 파룬궁을 연구회에 등록했다.

92년과 93년 베이징 동방건강박람회에서 리훙즈 선생은 연속 명예상과 최고인기 기공사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94년 겨울에는 리훙즈 선생의 대표 저서 <전법륜>이 국영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돼 베이징 공안대학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전법륜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리훙즈 선생은 2년간 모든 중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강의하고 수련을 지도했다.

1998년 중국 정부가 주최한 아시아체육대회에서 만 명의 수련생들이 파룬궁 연공을 시범 보이고 있다.
1998년 중국 정부가 주최한 아시아체육대회에서 만 명의 수련생들이 파룬궁 연공을 시범 보이고 있다.
중국 내 3대 석간으로 꼽히는 광둥성 광저우시의 는 1998년 11월 파룬궁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중국 내 3대 석간으로 꼽히는 광둥성 광저우시의 <양성만보>는 1998년 11월 파룬궁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98년 중국 국가체육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당시 파룬궁을 수련하는 중국인은 7천만 이상이었고 이듬해에는 약 1억 명에 달했다. 대부분 중국인에게 가족이나 친구 중 파룬궁 수련생이 있었고 베이징 현역 군 장성, 국무원 관리, 고위 당위원 등 각계각층에서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했다. 파룬궁은 당시 정부가 인정하는 최고의 공파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파였다.

급격한 성장이 부른 공산당의 견제

리훙즈 선생은 항상 수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수련자에게서 돈을 모으거나 기부받는 것을 불허했다. 그러나 기공과학연구회는 관련 연구 실적은 없이 기공 단체를 통해 수익만 올리자 96년 초, 파룬궁은 연구회를 탈퇴했다. 이후 파룬궁의 인기는 더 높아졌고 공산당은 연구회를 탈퇴한 파룬궁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파룬궁의 급격한 성장과 파룬궁이 뿌리를 둔 전통적인 가치관은 마르크스와 무신론을 믿는 중국공산당을 두렵게 했다. 탁월한 건강 증진 효과를 인정하며 파룬궁 수련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공산당도 수련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파룬궁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이 처음 부딪힌 문제는 언론과의 마찰이었다. 96년 관영신문 광명일보는 파룬궁의 주요 수련서 <전법륜>을 비난했고, 곧 수련자들의 대규모 청원이 일어났다. 압력을 느낀 신문사는 꼬리를 내렸지만, 비방과 청원 그리고 기사를 철회하는 패턴은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해 말, 파룬궁 주요 수련서인 <전법륜>의 출판도 금지됐다.

97년부터 98년까지 당시 중앙 정법위 서기 뤄간은 공안에 지시해 파룬궁을 조사했다. 일종의 사교 혹은 악마성을 가르치는 종교라는 증거를 수집해 탄압의 구실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찾아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파룬궁이 종교라는 결론조차 내리지 못했다. 중국에서 종교란 예배당이나 의식, 조직의 형태를 갖춰야 하지만 파룬궁은 자원봉사자들이 전하는 느슨한 형태였고 그게 전부였다.

평화와 인내로 맞선 공산당의 폭력

극적인 순간은 99년 4월 11일 발생했다. 톈진 교육대학 <청소년박람> 잡지에 ‘청소년들은 왜 기공을 수련하면 안 되는가?’라는 기사를 실어 파룬궁을 포함한 모든 기공을 비방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이와 관련한 청원을 시작하자 공안국은 기사를 철회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11일 이후 공안국은 경찰을 투입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수련자들은 즉시 시와 성 정부에 청원했지만, 그들은 권한 밖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23일에는 공안과 무장경찰을 투입해 45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노인과 임산부도 포함돼 있었다. 수련자들이 그들을 찾아가 항의하자, 공안국은 베이징에서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이니, 불만이 있으면 베이징에 가서 말하라는 것이었다.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탄압을 중지하라며 베이징에 모여든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청원 모습으로 중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탄압을 중지하라며 베이징에 모여든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청원 모습으로 중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결국, 4월 25일 1만여 명의 수련자들은 청원을 위해 베이징 푸유가 부근 국무원 민원사무실로 모였고 감금된 톈진 수련자를 석방하고 파룬궁에 합법적인 수련 환경을 요구했다. 당시 주룽지 총리가 청원하러 온 파룬궁 수련자들을 접대하고 동시에 톈진 경찰에게 수련생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해 수련자들이 석방되어 사건은 평화롭게 해결됐다.

천안문 유혈진압 10주기를 앞둔 4월 25일 중국공산당은 또 한차례 대규모 시위를 폭력 없이 넘겼다. ‘4.25사건’은 큰 관심을 끌었지만, 파룬궁의 인기를 식히진 못했다. 3개월 동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진정으로 중국이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청원을 위해 모였던 수련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 붙어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연공을 했다. 또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종이나 쓰레기 하나 없이 매우 깨끗했다.

1999년 7월 20일, 그 날 이후

그로부터 3개월 후인 7월 20일, 당시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파룬궁 탄압을 결정했다.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처럼 파룬궁에 대한 왜곡선전과 소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사복경찰이 파룬궁 수련생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천안문 광장에서 사복경찰이 파룬궁 수련생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중국 광둥성 관영언론 산둥성 웨이하이시 기자였던 왕다팡은 4월 25일 이후부터 박해가 시작되기 전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박해가 시작되기 3개월 전 탄압이 곧 시작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당시 방송이나 TV는 전부 파룬궁이 건강에 좋다고 선전했죠. 모두 파룬궁을 인정하는데 금지하다니……. 일부 기자들은 이미 통지를 받고 파룬궁과 관련해 부정적인 자료를 수집했어요. ‘또 정치 운동을 하겠구나’라고 짐작이 갔어요. 당시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파룬궁이 좋다는 것은 알았어요. 부모님이 수련하셨거든요.”

탄압 소문이 점점 퍼지자 그녀는 가족의 안전이 걱정됐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아침 연공장을 찾은 그녀는 광장 주변의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연공 중인 수련생을 향해 물을 뿌리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아주 충격적이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일종의 정의감이랄까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뛰어가서 그들 앞줄에 앉아서 함께 물기둥을 맞았어요. 수압이 너무 강해서 눈을 뜨거나 숨도 쉬기 어려웠어요. 옆에 앉은 한 여성 수련생은 울면서 ‘왜 저희를 이렇게 대하나요?’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평온하게 앉아 있었어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했어요. 수련생들을 지지해야겠다. 그들과 함께하자!’라고 생각했죠.”

그녀는 이후 파룬궁을 수련했고 3개월 후인 7월부터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그녀와 가족들은 파룬궁을 위해 수차례 탄원했으나 매번 붙잡혔다. 고위직 은행원이었던 그녀의 여동생은 강제수용소에서 잔혹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고 촉망받던 엔지니어였던 오빠도 13년 징역을 살며 수많은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마음이 아주 복잡했어요. 당시 전 진·선·인에 따라 수련했기에 분노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믿을 수 없었어요. 정부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진(眞)·선(善)·인(忍)을 말하는 좋은 사람을 탄압하다니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2001년 11월 20일, 35명의 서양인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파룬궁 박해 중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청원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20일, 35명의 서양인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파룬궁 박해 중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청원을 하고 있다.

왕다팡의 사례는 대부분 파룬궁 수련생이 받은 박해의 축소판이다. 이후 지금까지도 중국의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은 고문, 감금, 강제노동, 강제 장기적출 등 반인륜적인 박해를 받고 있다. 또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중국 전통 수련문화에 대한 사랑으로 파룬궁을 수련중이며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중국에서 일어나는 박해를 막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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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인종, 연령을 초월해 전 세계인이 수련하는 파룬궁
적과 인종, 연령을 초월해 전 세계인이 수련하는 파룬궁

의학계도 놀란 파룬궁의 수련 효과

파룬궁을 수련하는 이들 중에는 만성 질환과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다 치유됐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 이는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 중국 당국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1998년 10월, 중국 국가체육총국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한 건강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의료전문가들이 북경에 거주하는 수련생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배포하여 회수한 12,731장에 대한 통계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중 6.6%만이 질병 없이 수련을 시작했으며, 20%는 한 가지, 23.6%는 두 가지, 49.8%는 세 가지 이상 질병이 있었다. 그들 중 58.5%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완전히 회복했고, 24.9%는 거의 회복했으며, 15.7%는 부분적으로 회복됐다고 답했다. 즉, 0.9%만이 건강 개선을 체험하지 못했으므로 총 치유율은 99.1%에 달했다.

2016년에는 스위스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연구원인 둥위훙 박사가 말기 암 환자의 파룬궁 수련 후 연명 효과, 증상 개선, 암 완치 등 다수의 임상 사례를 보고한 논문을 발표해 미국 임상종양학회의 승인을 받았다. 둥 박사는 약 5개월의 수명을 진단받은 말기 암 환자 152명에 대한 임상 조사를 진행, 이들이 파룬궁 수련을 한 후 생존 기간이 애초 진단을 받은 5개월에서 평균 56개월로 늘어나고 97%의 환자가 수련 시작 후 암이 소실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해 의학계에 놀라움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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